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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연, 견고한 자수 위 자유로움


©jooyeonkoh

Editor comment


한 올 한 올 정밀하게 쌓아올린 자수에서 느낄 수 있는 아이 같은 자유로움. 고주연 작가의 작품은 이런 천진난만함 덕분에 무척 독특하게 느껴진다. 누구나 봤을 만한 일상적인 사물들이 직물 위에서 분해되고, 이렇게 삐죽 어긋나며 생긴 공백에서는 발랄한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 바로 이점이 그의 작품을 다시 보게 만드는 매력적인 요소다.


‘해결되지 않은 사건의 목격자를 동행자로’ 바꾸어 나가기 위해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고주연 작가는 ‘케첩병’과의 화해 이후 또 어떤 사물과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이 말의 뜻이 궁금하다면, 인터뷰에서 확인해 보길 바란다.



Interview



고주연


"저에게 담긴 주제는 자유로움과 해방이라고 생각해요.

얽매인 것들에게 잠깐의 숨을 돌릴 여유를 찾아주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작가와 작품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고주연입니다. 루틴 속에서 변화하는 풍경을 포착해 그 너머의 이야기를 상상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작가님과는 제일 첫 번째로 ‘자수’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자수를 사랑하시게 된 배경을 알려주세요.

이전에 패션 관련 일을 꽤 오래 했었어요. 그 안에 들어가는 패브릭 패턴이라든지 로고, 그래픽들을 개발했었지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패브릭에 관심이 가게 되었고요. 작업물들이 의류 위에 표현되어 출력되는 경험이 정말 새롭고 재밌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수 기계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기계 자수로 표현되는 실의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한 올 한 올 실들이 중첩되며 쌓아 올라가는 방식이 정말 매력적이에요.


<Thing on my mind - Birthday Package> ©jooyeonkoh


이번 전시에서 ‘생각나는 것들’이라는 작품으로 참여하게 되셨어요. 이전에도 ‘생각나는 것들’이라는 이름으로 일러스트를 제작하신 적이 있으시죠. 일상적인 것들이 작가님의 시선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이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시절은 한창 작업 방향에 대한 고민이 많던 시기였어요. 목적에 맞춰 소비되는 이미지 작업을 기계적으로 쳐내는 이런 작업의 끝에서 남는 것이 무엇일까?하는 공허함이 찾아왔죠.

그러다보니 클라이언트 잡을 2년 정도 멈추고 재정비 시간을 갖게 됐어요.


나를 돌아보는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는데 여러 사건들이 자꾸 마음에 턱하고 걸려있더라고요. 그런 일들을 떠올리면 항상 옆에 있던 주변 풍경과 물건들이 머릿속을 맴돌곤 했어요. 사건에 얽힌 오브제들을 그리면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상적 사물들이 제 그림속에 많이 등장하게 된 것 같아요.



위 질문에 이어, 작품 소개에서는 ‘생각나는 것들은 일상적 사물에 담긴 기억을 그린다. 나는 이 작업을 반복하여 목격자를 동행자로 바꾸고자 한다.’는 말이 인상 깊었어요. 어떤 의미인지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제 머릿속에 해결되지 않은 사건들이 존재해요. 대체로 후회가 남는 일들이 많죠. 사건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주변부 풍경에 시선이 머물러요. 예를 들어 그곳에 '케첩병'이 있었다면 그 '케첩병'은 나의 바보 같은 순간들을 다 알고 있는 목격자에요. 끊임없이 저는 '케첩병'만 떠올려도 주눅이 들게 되죠. 왜냐면 '케첩병'은 다 알고 있으니까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 풍경 속의 목격자들을 하나하나 돌아보게 돼요. 그들의 초상화를 다시 그리면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죠. 결국은 맞닥뜨려야 하는 것 같아요. 피하기보다는 다시 잘 지내기 위해서. 그리고 동행하기 위해서요. 일단 저는 '케첩병'하고는 화해했습니다.



<CHAIRS> ©jooyeonkoh




그림을 그릴 때와 자수 작업을 할 때, 어떤 점들이 다른가요?

물론 물성 자체의 흥미로움도 자수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지만, 요즘은 자수가 산업화된 방식의 전통의 모방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당장이라도 팔 수 있도록 제품화된 자동화되고 정제된 상태의 전통적 방식 작업물인 거죠.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제 그림을 표현한다는 게 흥미로워요.


생각나는 것들이라는 시리즈 또한 복잡하게 얽힌 기억을 새롭게 정리하여 관계를 재 정립하는 것이니까요. 어느 지점은 의미가 맞닿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마치 판화를 찍듯이 기계자수로 그림을 뽑아내고 있어요. 이로써 나의 기억이 정제되고 체계화되어 사람들에게도 내보일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죠.



작가의 가치관



작가님의 꾸준하고 일관적인 작업물을 보면 작가님의 작업 철학이 궁금해져요.

예전엔 외적인 이미지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장식적인 요소 같은 것들이요. 그러다가 소비되는 이미지와 마음에 남는 이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앞으로는 오래도록 기억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제 스토리텔러가 되고 싶어요.



<한땀한땀 애니멀> ©jooyeonkoh





조금 다른 얘기로 넘어갈게요. 'k-paper'와 평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동물들에 대해 콜라보를 진행한 것을 봤어요. 당시의 작업물과, 작업 과정에 대해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주변에 있는 친숙한 동물들을 주제로 작업했던 작업이에요. 제주도의 양떼목장에 살고 있는 동물들을 주인공으로 카드를 만들었어요. 보더콜리, 양, 얼룩 토끼가 주인공이지요. 동물을 그리는 것은 항상 즐거워요. 털북숭이 친구들을 보면 웃음이 나거든요. 동물 프로젝트 카드는 구매하는 동시에 동물자유연대에서 운영하는 ‘쓰담쓰담’에 기부되고 있답니다!




작가님의 작품은 동화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그림책을 만드는 것에도 관심이 있으실까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세뱃돈이랑 용돈, 이런저런 것들을 다 끌어모아 17만 원을 들여 그림책 전집을 샀어요. 한 장 한 장 아껴가며 넘겨봤었는데 너무너무 아껴보다 보니 전집을 끝까지 다 못 읽었던 기억이 있네요.


막상 대학에서는 디지털 위주의 작업을 많이 했어요. 졸업식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 그림책 관련 포스터를 우연히 봤는데, 너무 아름다운 거 있죠. 교보문고에서 그림책 코너를 서성이던 순간이 아직도 생각나요. 휴대폰 주소록을 한참 바라보며 그림책을 그리고 싶다는 문자를 교수님에게 보내려 했지만 결국 포기했죠. 너무 막막했어요. 당장 돈을 벌어야 했기도 했고요. 돌아 돌아 결국 이야기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네요. 다시 기회가 주어졌으니 열심히 작업해보려고요.




<JEJU MANDARIN> ©jooyeonkoh




작가의 성장



7개월 동안 볼로냐 그림책 워크숍으로 ‘고양이 대소동’의 삽화 작업을 하셨어요. 오랜 기간 작업을 하신 만큼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은데, 작업 과정 중의 경험을 공유해 주실 수 있나요?

저는 혼자서 중얼거리는 사람이었어요. 소통이라는 것에 관심이 없었죠. 어느 순간 외롭다는 생각이 밀려들더라고요. 나의 작업과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져 그림책 공부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림책에 관련된 워크숍도 듣고 스터디도 나가면서 다양한 선생님, 동료들을 만났어요. 혼자 고민하고 결정하는 스타일이었는데 마음가짐이 많이 바뀌게 되었어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는 조금 더 넒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볼로냐 그림책 워크숍에서 만들었던 '고양이 대소동'이라는 더미 북은 아직 출간 기회를 갖지 못했어요. 소통에 대한 저의 미숙함이 드러났던 작업인 것 같아요. 조금 더 다듬어서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하려고 해요.


그러고 보면 정말 마음이 많이 열린 것 같아요. 이전이라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던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텐데 말이에요!



볼로냐 그림책 워크숍 10기 원화전 포스터 ©jooyeonkoh



오랜 기간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며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이미지가 점점 소진되어가고 부품이 되어간다는 것이 힘들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좋은 작가분들이 계속 생겨나지만 내 색깔은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았어요. 이젠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려 하고 있어요. 나와 맞는 작업들을 엄선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작품이나,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으신가요?

70살까지 그림 그리는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한적한 곳에 있는 작업실, 친구들과 함께 사는 마을, 매일매일 이런저런 작업들과 전시.. 주말마다 파티를 열 수 있는 멋있는 할머니! 그리고 고양이 12마리와 함께 사는거죠!


작가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작가로 기억에 남고 싶나요?

저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요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만들어보고 있는데 정말 신기한 것이 결국엔 소재만 다르지 주제가 같더라고요.


결국 사람이 성향을 타고나듯이 평생 동안 하는 이야기를 담고 태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에게 담긴 주제는 자유로움과 해방이라고 생각해요. 얽매인 것들에게 잠깐의 숨을 돌릴 여유를 찾아주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2021 Calendar> ©jooyeonkoh




TMI PARTY 🤹‍♂️


작가님의 작품을 세 가지 키워드로 말해주세요.

자유, 발견, 즐거움.



작가님께서 가장 애정 하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생각나는 것들'이 작업의 전환점이 되었던 계기라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소개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전엔 조금 무거운 생각들과 사건을 얽어서 시리즈를 만들었다면 요즘은 가벼운 감정에 관한 그림들도 그리고 있어요. 기대감이라든지, 기쁨에 관련된 것들이요. 앞으로도 계속 시리즈를 만들어낼 예정이니 지켜봐 주세요~


<생각나는 것들> ©jooyeonkoh



직접 작업하신 자수 작품들은 어떻게 보관되고 있나요?

작업물은 차곡차곡 리빙박스 속에 쌓아 놓고 있어요. 자수 작업물을 만들기 시작한 지 어느덧 4년 가까이됐기 때문에. 정말 많은 실과 천과 자수 작업들이 쌓이고 있어요.


실물의 완성된 이미지로 하나의 자수를 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디지털 상에서 콜라주 하여 완성하는 경우는 부분 부분 자수 조각들이 남겨지는데, 최근엔 조금 감당이 안 되는 지점을 넘어서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이런 조각들은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솔직히 고민이 돼요. 피지컬 작업에서 결국엔 피할 수 없는 부분인가 봐요. 나중에 이 작업의 부산물을 가지고 무언가 재밌는 프로젝트를 기획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Let’s PURRRR anyway> ©jooyeonkoh



작품에 표범을 닮은 고양이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궁금해요.

같이 살고 있는 고양이에요. 본가에 3마리, 지금 사는 집에 2마리가 있는데 그림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주로 생활을 같이하는 코비와 트윕시에요. 고양이들이 저에게 있어서 뮤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어요. 항상 곁에 있다 보니 재밌는 상황들을 자주 목격하게 돼요. 안 그릴 수가 없죠!


그리고 그림이 그리기 싫거나 작업을 해야 하는데 집중이 안 될 경우엔 항상 고양이를 그리면서 손을 풀어요. 그러다 보면 다른 그림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들어서 작업을 시작하지요.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에 고양이가 등장하게 된 것 같아요.

하지만 나중에 정말 시간이 많이 흘러 고양이를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나의 모든 그림에 그려진 코비와 트윕시를 보면 눈물이 정말 많이 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다신 볼 수 없는 사랑하는 존재가 내 모든 곳에 남아있을 텐데 감당이 안 될 것 같거든요..


최근엔 그래서인지 코비와 트윕시를 주제로 작업을 많이 하지 않으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고양이를 그리는 걸 멈출 수가 없네요. 행복한 그 순간을 즐기는 게 맞겠죠?


Proscenium, 51.4065296,94.719013 ©jooyeonk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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